이곳에 가면 독일이

 

철학자의 나라란 것을....

 

 

 

요한 고트립 피히테,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임마누엘 칸트, 프리드리 빌헬름 요제프 셀링, 아투어 쇼펜하우어,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에드문트 후설, 칼 야스퍼스, 마틴 하이데거....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독일은 수많은 철학자를 배출한 나라다.

 

이 나라에 철학자가 많은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오늘날의 독일 청춘들에게서 고뇌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미풍에도 흔들릴 것 같은 사유의 가벼움이 감지될 때마다 ‘철학? 풋~’ 코웃음이 절로 난다.

 

 

 

그러나 독일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겨울을 살아본 사람이면 이 나라가 왜 철학의 나라가 되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독일인은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집안으로 집안으로만 숨어든다. 어둠과 습기를 몰고오는 북구의 겨울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앗아갈 정도로 음습하다. 겨울 저녁나절에 산책을 나가보면 모두가 잠든 고요한 동굴 속을 걷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주택가는 이미 죽음의 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적막하다. 집집의 창문마다 이미 모두 셔터가 내려져 있고 한 줄기의 빛도 새어나오지 않아 안에 사람이 있는지 조차 분간할 수 없다.

 

도둑이 무서워서 인지 단열을 위해선지 가정집에도 창문마다 셔터를 달아놓았다. 집안에 전등을 켜야 하는 시간이면 가장 먼저 창문의 셔터를 모두 내린다. 아마도 안에 불을 밝히면 밖에서 쉽게 안이 들여다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차르르’ 셔터 내려오는 소리만 들으면 방금 ‘할로!’하고 반갑게 인사하고 헤어졌던 이웃이 점점 멀어지며 마음의 빗장을 거는 것 같다. 창문의 빛이 사라져가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저~잠깐만요!’하고 다시 한 번 불러 보고 싶지만, 결국 돌아서며 ‘나도 이제 문을 잠글 시간이구나.’ 확인하곤 한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주택가는 자정이 지나도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있는 집이 많았다. 추우나 더우나 들여다보이는 창문 너머로 가족들이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장면들,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싸우는 사람들, 늦은 시간에도 쿵쾅거리며 거실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시끌벅적한 모습들이 특히 그리워지는 계절이 독일의 겨울이다.

 

그런 겨울엔 사색에 잠길 수밖에 없다. 자신의 깊은 내면과 마주하지 않으면  긴 겨울의 고독을 이겨내기 쉽지 않다. 과거 독일이란 나라에 꽃피운 철학은 이 계절이 키운 열매가 아니었을까?

 

하이델베르크에 가면 철학자의 길이 있다. 시내에서 네카강이 내려다 보이는 비탈진 언덕을 향해 2킬로미터 이어진 길이다. 하이델베르크에 이 길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후부터 꼭 한 번 걸어보고 싶었었다.

 

얼마 전 일이 있어 하이델베르크에 갔을 때 드디어 그 길을 걸어보았다. 처음엔 지도를 보고 찾아갔지만 철학자의 길이 시작되는 필로조펜백(philosophenweg) 입구 베억스트라세에서 안내팻말이 눈에 띄지 않아 잠시 헤매었다. ‘지도상으로는 분명 이쯤인데’라며 걸어들어 간 길은 노이엔하임이란 동네의 고급 주택가의 가파른 골목이었다.

 

오래된 고급 저택들이 비탈진 언덕을 끼고 강을 바라보고 줄을 지어 서있었다. 함께 간 사람들이 하이델베르크에서 부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로 유명하다고 일러주었다. 독일도 어느 도시나 경치 좋은 땅은 부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보아왔기에 신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100년가까이 된 집들이 그토록 건재하다는 사실은 항상 나를 경탄케 한다.

 

가파른 주택가 골목을 끼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힐 때 쯤 되니 네카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 나타났다. 철학자의 길의 종착지였다. 언덕에 서성이며 강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관광객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구경꾼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벤치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눈이 띈다. 그들은 바로 옆에 누가 지나가는지, 자신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지 관심 없이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것 같다.

 

의자에 길게 다리를 펴고 편안한 자세로 책보다는 책 읽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듯 보이는 노신사에게 다가가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기꺼이 응하며 웃어주었다.

 

그의 미소를 보면서 ‘아, 여기가 바로 철학자의 길이었지.’라며 본래 독일인의 모습을 그제서 보는 것 같았다. 과거 문학을 사랑하고 철학을 꽃피우던 독일. 그 역사가 흔적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실존하고 있다는 반증인 것 같아 그 길에서 책을 읽고 혹은 사색에 잠긴 사람들이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로 유명한지 알 것 같다. 사색과 토론을 즐겨하던 선배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이렇게 철학자의 길이라는 이름을 남겼을 정도니 말이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여전히 독일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대학이다. 명문대학이란 개념은 사라진 독일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 대학은 독일학생들이 가장 입학하고 싶어 하고 사랑받는 대학이다.

 

과거 ‘철학자의 길’이란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생들이 강이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언덕에서 독서를 하고 토론을 하기위해 이 길을 찾으면서 부터였다고 한다. 그들만의 공간이었던 언덕으로 오르는 긴 길을 ‘철학자의 길’이라고 부르며 즐겼던 것이다.

Posted by 무터킨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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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oramirang 2012.04.27 06: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터킨더님의 오늘을 낳은 땅이군요. 늘 건강하세요. ^^

  2. 참교육 2012.04.27 0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철학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쓰셨군요.
    저는 지금까지 선생님이 쓰신 독일 교육이 민주주의와 역사의식을 살리는 원천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3. 이세진 2012.04.27 07: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마치 저 길을 걷고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덕분에 독일간접여행(?)을 하는군요. 잘 읽었습니다ㅎㅎ

  4. 도플파란 2012.04.27 1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학위 받으신 교수님이 생각나네요...ㅋㅋㅋ

  5. 빨간모자 2012.04.27 1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걸 저도 한번 딱 한번 가봤네요 .. 저는 거꾸로 좁은 골목으로 올라가서 고급주택가로 내려왔죠. 멋진 풍경과 여유있는 독일인들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6. 똘멩이 2012.04.28 2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친한 벗과 함께 철학자의 길 벤치에서 긴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봄이라 그런가요, 그 다리와 그 주점과 그 길 모두 그립습니다.

  7. ghd baratas 2013.04.08 2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패는 받아들여도 도전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8. 2013.08.28 0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마크툽 2015.09.22 2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철학자의 길은 철학자가 걸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은 아닙니다. 옛날 독일 사람들이 대학생들을 철학자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유학을 하다가 보면 교수와 학생이 동등한 위치에서 토론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것이 교수가 학생을 단지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연구하고 고민하는 철학자로 대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